매일의 생각

48) 2023년의 끝자락에서

Hazel Y. 2023. 12. 31. 22:03

도대체 뭘 했다고 벌써 2023년이 끝나는 거지.

 

그래도 돌이켜 보면 나에게 있어 2023년은 끝없는 변화와 도전, 그리고 성장의 한 해였던 것 같다.

 

2023년의 시작은 프랑스 파리에서 맞이했다.

 

당시 나는 네덜란드 석사 유학생이었고, 유학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이 마침 파리에서 교환학생 중이라 이번 새해는 그곳에서 한 번 보내볼까 싶어서 방문했다.

 

파리에서 짧은 뉴이어 홀리데이를 보내고 네덜란드에 돌아간 나는 인턴십과 논문 때문에 바로 다음 날부터 일상으로 복귀해야 했다.

 

그래서 1월은 인턴십 하는 회사에도 적응하고 논문 주제도 정하느라 한 달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게 정신 없이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 부모님을 통해 친할머니의 부고를 듣게 되었고, 잠시라도 가족과 함께 있고자 2월은 5일 동안 한국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가족의 얼굴을 직접 보고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한국엔 맛있는 것도 어찌나 많은지.

 

솔직히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일상은 네덜란드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족과 더 오래 있고 싶은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한 채 다시 네덜란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그렇게 남은 2월은 출근과 퇴근, 주 2회 재택 근무의 영원한 반복이었다.

 

아 참, 2월 초중순 즈음에 내가 책임지고 준비한 동아리 소셜 이벤트가 열렸다.

(Rotterdam Consulting Club이라는 컨설팅 동아리의 Marketing & Event 위원회 활동의 일환이었다.)

 

근처 바 몇 군데에 연락을 취해서 장소를 섭외하고 그쪽 관리자 측과 우리 동아리 이사회 친구들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게 나의 업무였다.

 

한국에서도 한 번도 안 해 본 활동이었어서 처음에는 많이 두려웠지만, 이벤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걸 보니 굉장히 뿌듯했다.

 

(그런데 2월에 찍은 사진들을 보니 내 얼굴에 트러블이 엄청 많이 나 있다. 그땐 딱히 못 느꼈는데, 스트레스를 좀 받은 게 아니었나 보다.)

 

3월도 뭐... 똑같았다.

 

출근과 퇴근, 그리고 주 2회는 재택 근무.

 

회사 화장실에서 거울 셀카를 처음 찍어 본 날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주변 친구들은 한두 명씩 취업을 하는 반면, 나는 석사 진학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인스타 스토리에 회사 화장실에서 사원증을 매고 거울 셀카를 찍어 올리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쟤네들은 벌써 취업도 해서 돈도 버는데, 나는 오히려 돈을 쓰기나 하고 있고... 나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래서 나도 인턴십 하는 회사에서 사원증을 매고 첫 화장실 거울 셀카를 찍었을 때 기분이 꽤나 좋았던 기억이 있다.

 

또 하루는 치킨이 너무 먹고 싶어 배달앱을 통해 로테르담의 한국식 치킨 맛집에서 배달 주문을 했는데, 그날이 마침 눈이 오던 날이라 근무하는 라이더들이 많이 없었는지 (네덜란드는 거의 모든 라이더들이 자전거로 배달을 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주문하고 거의 4시간 뒤에 음식을 받아서 저녁이 아닌 야식 느낌으로 먹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그날을 계기로 네덜란드에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엔 아무리 배달 음식이 먹고 싶어도 무조건 직접 요리해서 먹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4월부터는 나의 내면이 조금씩 찢기기 시작했다.

 

아니, 그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 흔적과 진행 상황이 피부 안쪽에서부터 느껴져 오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4월 중순 즈음부터 시작된 간헐적 우울과 무기력은 나를 고통의 핵으로 몰고 갔다.

 

그 녀석들이 찾아오면 일주일 정도 내 곁에서 머물다 가곤 했고, 그때마다 나는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어두컴컴한 동굴을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고, 씻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뜨고 의식이 있는 상태에선 자꾸 눈물만 쏟아지고 우울의 구렁텅이 속으로 추락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잠 자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잠에 들면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었다.

 

인턴십, 논문, 학교 수업과 과제, 동아리 활동, 대외 활동 등 벌려 놓은 일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나는 그런 나의 마음을 최대한 숨기고 외면한 채 일상에 더 집중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5월이 되었다.

 

한동안 우울이라는 녀석이 모습을 보이지 않길래 그렇게 그 녀석과 조용히 작별을 고한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되었다.

 

겨우 붙잡고 있던 내 내면의 가냘픈 실오라기는 얼마 가지 못해 너무나도 쉽게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온 녀석들은 그 동안 어디 가서 힘을 키우고 온 건지 훨씬 강력해졌다.

 

그러나 난 녀석들을 상대해 본 적이 있는 나름의 경력자였다.

 

4월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나는 내 일상에 더 많이 집중하려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느샌가 나의 내면은 원래대로, 아니 적어도 일상 생활이 어렵지 않게 가능한 수준으로는 회복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더 이상 외면하고 덮어놓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저녁에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울다가 문득 이렇게 살아서 뭘 하나, 그냥 삶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

 

그래서 결국엔 내가 근무했던 팀 매니저님께 연락을 드려 솔직하게 사정을 말씀 드리고 일주일 회사를 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일주일 동안 회사를 쉬는 건 무책임한 선택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 나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내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는 건 자살과 다를 게 없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집에서 거의 잠만 잤다.

 

깨어 있는 잠깐의 시간엔 생존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먹고 아주 가끔 논문 작업도 이어 갔다.

 

그렇게 푹 쉬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은 다시 좋아졌고, 회사 팀 회식과 동아리 야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에너지 레벨도 눈에 띄게 회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름철이 다가오는 네덜란드는 아직은 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해가 쨍하게 비추는 날들이 많아지며 날씨가 점점 좋아져 갔다.

6월은 많은 것들이 마무리가 되는 달이었다.

 

일단 지난 9개월 동안 참여했던 대외 활동의 졸업 행사가 있었고, 인턴십도 끝이 났다.

 

인턴십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 팀 회식이 있었는데, 팀원들이 나 몰래 롤링페이퍼와 기프트 카드 선물도 준비한 걸 보고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학교 수업도 모두 끝이 났고, 논문도 제출했고 디펜스도 있었다.

 

특히 논문은 정말 어느 세월에 끝내나 싶었는데 어찌저찌 끝은 난 걸 보고 뭐든 일단 하면 죽이든 밥이든 되긴 하는구나 라는 걸 느꼈다.

 

이렇게 6월에 마무리된 모든 것들을 나열해 놓고 보니 나 참 많은 걸 했구나 싶다.

 

나 참 고생했구나. 나 참 열심히 살았구나. 그것도 우리나라도 아닌 네덜란드에서.

(이 문장 적는데 눈물이 나는 걸 보니 그때 나 많이 힘들었나 보다.)

 

7월은 귀국 준비로 바빴던 것 같다.

 

겨울옷과 같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짐들은 한국으로 택배를 부치고, 한국으로 들고 갈 수 없는 큰 짐들은 중고로 다른 학생들에게 파는 등 짐들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또 그곳에서 가깝게 지냈던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언제가 될지, 오긴 할 건지 아무도 모를 다음을 기약했다.

 

특히 한 더치인 친구가 집에서 작은 졸업 파티를 한다고 초대해서 갔는데, 그렇게 현지인 가족 집에 초대받아서 간 적은 처음이라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7월 중순 나는 귀국했다.

 

아 참, 원래는 귀국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처음 네덜란드에 갈 때, 그리고 올해 3월 정도까지만 해도 나는 네덜란드에서 취업해서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3월이 끝나갈 때 즈음인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물론 그건 대학교 2학년, 그러니까 내가 만으로 20살이었을 때부터 경영이라는 전공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지만 최대한 그 전공에 붙어 있다 보면 언젠가 괜찮아지겠지 하는 생각에 고이 덮어두었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이제는 정말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삶을 나아가야겠다, 더 이상 지체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나의 전신을 지배했고, 고민한 결과 현지 취업 대신 전공을 바꿔서 석사를 다시 하기로 하면서 귀국을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정말 인생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눈 앞에 놓여진 것들에 오롯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미친 수준의 이상주의자인 나는 그걸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8월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두 번째 석사 지원을 위해 준비 중에 있다.

(9월 초 아주 잠깐 졸업장을 받으러 네덜란드에 갔다 온 것 빼면 8월부터 지금까지 이렇다 할 일들은 없었던 것 같다. 아침엔 헬스장 가고 남은 하루는 집에서 공부하는 그저 잔잔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경영정보학에서 생물정보학으로.

큰 듯 그리 크지 않은 듯한 커리어 체인지를 위해 학사 레벨에 해당하는 생물학 기초 핵심 과목들을 공부하고 있다.

 

내 주변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바본가. 경영정보 커리어로 그대로 가면 생물정보 전공하는 것보다 돈도 훨씬 잘 벌 수 있는데, 왜 바꾸는 거지.

특히 우리나라에서 생물 쪽은... 뭐, 굶어 죽진 않겠지만.

 

나도 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냥 네덜란드에서 경영 데이터 직무로 커리어를 이어갈 걸 그랬나. 너무 성급한 선택이었나. 내가 돈을 내 발로 찬 격은 아닐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생존에 있어서 필수인 요소이긴 하다.

 

돈이 수중에 없으면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돈만 좇는 인생만큼 슬픈 건 없다고 생각한다.

 

돈은 크게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향해 나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꿈꾸는 내 삶의 가치는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게 2023년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의 소원 같은 것이다.

 

2024년엔 또 어떤 희노애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년에도 내가 그리는 행복한 삶에 지금보다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그런 건강한 한 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도 복이 한껏 깃드는 새해가 되길 바란다.

 

Photo by Javon Swaby


* 해당 글에 대한 무단 배포 및 복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