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
바람도 꽤 불어서 이젠 창문을 열어놓고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그 바람을 쐬면 약간 추운 것 같기도 하다.
여름 내내 너무 더워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을이 이제 슬 오려나 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이라는 말이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선생님 등을 포함한 많은 어른들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방학 숙제로 독후감은 필수였고, 고등학생 때 대입으로 그렇게 바쁜 시기에도 서평 쓰기 과제가 있었을 만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해 보였다.
하긴, 반에 꼭 한 명은 있는 책벌레 친구들이 모의고사와 수능을 포함한 각종 국어 시험들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고득점을 하는 걸 한 두번 본 게 아니니 독서가 중요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긴 했다.
(특히 국어가 항상 걸림돌이었고 수능 국어까지 처참하게 말아먹은 나로서는 책을 평소에 손에서 놓지 않은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 사이의 차이를 더 도드라지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책을 그다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 아니 핑계에서였다.
게다가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각종 소셜 미디어들이 또래 친구들 사이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면서, 책보다 더 직관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물들에의 노출이 더 많았다.
그래서 책은 더 멀리 하게 되었다.
그러다 작년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한국과 네덜란드 사이를 오고 갈 기회가 많았다.
국제선은 부칠 짐이 없는 경우 최소 2시간 전, 있는 경우 최소 2.5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내가 갖고 있는 원칙이라 항상 모든 출국 수속을 다 밟고 게이트들이 있는 공항 내부로 들어가도 보딩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뭔가 지성인 같고 멋있어 보였기 때문일까.
공항에만 가면 홀린 듯 서점으로 들어가 책을 한 권 사고 그 책을 읽으면서 보딩을 기다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독서를 안 한지 너무 오래 되어 정말 보딩 대기 시간에만 대여섯 페이지 겨우 읽고 집에 도착하면 방치해놓곤 했다.
그러다 그렇게 사 와서 제대로 읽지는 않는 책들이 한 권씩 늘어나자 이젠 정말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 전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1시간 보던 그 시간에 책 읽는 시간을 적어도 10분이라도 끼워넣기로 다짐했다.
(독서 습관 형성에 있어서는 이틀 전 소개한 챌린저스 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처음엔 솔직히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것이 힘들었다.
더 재미있는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있는데 왜 내가 이 지루한 글자로 뒤덮힌 책을 읽어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렇게 자기 전 책 읽기를 약 한 달 동안 꾸역꾸역 실천하니 독서가 점점 즐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재밌는 활동을 왜 여태껏 미뤄왔을까.
요즘은 가끔 영상물 시청보다 독서가 더 재밌을 때도 있다.
그렇게 느끼는 나도 스스로가 참 신기하다.
특히 유튜브는 중독성이 강해 알고리즘에 뜬 영상을 아무거나 한 번 보기 시작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는 경향이 있다. (유튜브 쇼츠가 등장하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
그렇게 유튜브의 알고리즘 속에서 몇 시간 헤엄치고 겨우 빠져나오고 나서 밀려드는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도 이렇게 시간을 낭비했구나.
하지만 독서는 다르다.
내 취향에 딱 맞는 읽기 좋은 책을 잘 고르고 독서가 습관으로 자리잡고 나면 내 머릿 속에서 그려지는 영상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는 영상물들만큼 재미있고 스릴 있으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죄책감도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한 장 한 장 줄어드는 남은 책 두께를 보면 강렬한 뿌듯함을 느낀다.
벌써 이 만큼이나 읽었구나.
독서가 이토록 활동적이면서 생산적인 것임을 왜 이때까지 몰랐을까.
독서라는 평생 친구를 드디어 만나게 되어 정말 행복하다.
- 25.633살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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