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두 편의 지난 글에 이어 나의 석사 졸업장 수령에 대한 세 번째 기록이다.
날이 밝았다.
네덜란드 여정의 주된 목표인 졸업장 관련 업무는 전날 모두 완료했기 때문에 마음이 한결 홀가분했다.
셋째 날 오전엔 석사 논문을 쓰면서 인턴 생활을 했던 회사 팀의 매니저님과 잠깐 커피 한 잔을 하기로, 그리고 오후엔 같은 학생 아파트 건물에 살았던 친구와 점심을 먹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사실 매니저님께는 바로 전날 갑작스럽게 연락드린 거라 어쩌면 못 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감사하게도 바쁜 와중에도 아주 잠깐은 시간이 된다 하셔서 인사와 근황 정도는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매니저님과 회사 건물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 회사는 내가 머물던 호텔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영혼이 없는 텅 빈 졸린 눈을 한 채 다니곤 했던 출근길을 다시금 따라 걸은 끝에 마주한 회사 건물은 익숙한 듯도 낯선 듯도 했다.
이제 그 회사 구성원이 아니라는 생각에 벌써 회사 건물과 낯을 가리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두세 달 전의 나는 매우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건물을 드나들었는데, 그날 나는 회사 임직원 분들과 리셉션 직원 분들의 눈치를 보며 처음엔 건물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을 서성였다.
5분 정도 그렇게 휴대폰만 보며 밖에서 멀뚱멀뚱 서 있다가 제법 강하게 부는 바람에 그냥 1층 로비 소파에 앉아서 매니저님을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곧이어 매니저님께서 로비로 오셨고, 우린 로비 바로 옆의 구내 식당으로 향했다.
아니나다를까 인턴 기간 동안 같이 일했던 매니저님께도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반갑고 오랜만에 봬서 신나더라도 이 낯 가리는 성격은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나 보다 싶었다.
커피를 한 잔씩 받아들고 자리에 앉고는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나는 요즘 집에서 공부하며 지내는 일상과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말씀드렸다.
매니저님께서도 일과 동시에 곧 파트타임으로 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아마 나의 그토록 힘들었던 인턴 생활을 돌이켜봤을 때 그것이 값졌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러한 위치에서도 끝없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던 까닭인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날도 바쁘셨던 매니저님을 위해 약 30분의 짧은 대화를 마친 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그와 작별의 악수를 나눴다.
그 후 나는 친구와의 점심 약속을 위해 곧바로 기차를 타고 로테르담으로 향했다.
그 친구가 나를 배려해서 점심은 한국에서 먹기 어려운 음식을 먹자는 제안을 하길래 우린 모로코 음식점인 Restaurant Bazar에 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곳은 작년 8월 말 학과 킥오프 행사의 일환으로 새롭게 만난 같은 과 학생들과 점심을 먹었던 곳이다.
그리고 어느덧 1년이 지나 졸업장을 받은 다음 날 다시 그곳에서 점심을 먹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1년 동안 겪은 수없이 많은 힘듦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네덜란드 석사 과정은 나에게 있어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어떤 금액의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경험이었다고 다시금 떠올렸다.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나는 친구와의 시간에 집중해 대화를 이어갔다.
그 친구는 네덜란드에서 학사와 석사를 둘 다 마쳤고, 우리나라로 치면 삼성 정도가 되는 네덜란드 대기업인 ASML에 취업했다.
자신이 그나마 좋아하는 분야로 석사를 하고 관련 분야로 대기업에 취업까지 성공한 친구를 보고 있으니 내 마음 속에선 부러움이 번져갔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오히려 나를 보고 멋있다고 했다.
기존의 길에서 그저 안주하지 않고 과감하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찾으러 가는 용기가 부럽다는 이유였다.
과연 인간이란 자신이 가진 것들은 종종 특별한 구석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치부해 버리는 반면, 자신에겐 없는 타인의 것들에 대해선 강한 선망을 느끼는 존재이구나 싶었다.
우린 배가 터지도록 점심을 먹고 (내가 시킨 메뉴는 1인분인 줄 알았는데 음식이 나오고 보니 양이 거의 2인분이었다..) 그럼에도 배에 버블티가 들어갈 공간은 있었는지 버블티를 한 잔씩 사 들고 Kralingse Bos 공원으로 가는 길에 학교 Polak (스터디 건물) 에 잠시 들렀다.
친구가 프린트할 것이 있다고 해서였다.
Polak 건물 출입구를 지나는 순간, 나는 팀플 회의를 하러 친구들과 4층의 프로젝트 룸으로 향하던 작년의 수많은 순간들 중 하나로 타임 슬립을 하는 듯 했다.
친구가 볼일을 보는 동안 나는 Polak 복도에 앉아 주변을 천천히 스캔했다.
정말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그리운 것 같았다.
참 이상했다.
분명 석사 과정이라는 터널을 지나는 동안엔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의 머릿속에서 미화가 된 것인지 다 지나고 보니 그래도 재밌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만의 추억 여행이 끝나갈 때쯤 친구도 프린트를 다 했다고 해서 우린 트램을 타고 계속해서 공원으로 향했다.
사실 Kralingse Bos는 석사 과정 1년 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 친구는 지난 1년 간 세네 번 정도 스트레스 받을 때 혼자 와서 산책도 하곤 했다고 했다.
가서 보니 이렇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곳에 왜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한 번도 와 보지 않았던 걸까 싶었다.
그날 날씨도 조금 덥고 해도 쨍쨍해서 호숫가엔 꽤나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수영을 하며 한낮을 즐기러 나와 있었다.
그러나 우린 그날 수영하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친구는 대신 호숫가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있는 동물 농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동물들을 좋아, 아니 사랑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아니나다를까 그곳엔 너무나도 귀여운 동물들이 많이 있었다.
아마 정말로 네덜란드 여정 전체를 통틀어서 내가 가장 행복해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동물 농장을 끝으로 그날 나의 일정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그 친구와도 기약 없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난 호텔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석사 과정을 하는 1년 동안 정말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비록 그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건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세상엔 그런 멋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에겐 매우 큰 동기 부여와 자산이 되었고, 앞으로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나만의 주체적인 방향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기에 그들은 나에게 참 고마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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