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연휴에도 끝은 있었다.
나는 연휴 거의 내내 집에서 공부를 했다.
난 공부하는 걸 적어도 싫어하진 않아서 그런 연휴가 딱히 아쉽지 않다.
오히려 알차게 보낸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명절이기에 친척들 얼굴은 봐야 한다는 생각에 추석 당일 오후엔 가족과 함께 할머니댁에 들렀다.
그곳에서 다들 모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모두가 워낙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바쁘다 보니 명절 당일이 유일하게 내가, 그리고 나의 모든 친척들이 서로 직접 만나서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서로에게 궁금한 게 참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난 주로 웃으며 인사만 나누고 그 후로는 대화를 듣고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인 참여는 웬만해선 하지 않는 편이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정말 명절에만, 그러니까 1년에 딱 두 번만 보는 사이다 보니, 서로 친밀해질 시간과 기회가 많이 없어 그들 앞에서 항상 낯을 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당연히 내가 대화를 시작해 이끌어 간 건 아니지만, 몇몇이 나에게 아주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앞으로의 나의 인생 계획에 대해 궁금해했다.
"네덜란드에서 석사 졸업했다면서. 그럼 이제는 뭐할 건데?"
"사실 전공을 바꿔서 석사를 다시 할 생각이에요."
"무슨 전공?"
"생물정보학이요."
이 정도 관심은 괜찮았다.
뭐, 누구나 궁금해할 것이니까.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그들의 첫 번째 생각 또한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갑자기 경영에서 생물이라니.
"그럼 그 석사는 어디서 할 건데? 언제부터 시작이야?"
다들 나만 쳐다보면서 앞으로의 나의 계획에 대해 묻는 것이 꼭 면접장에 온 듯했다.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어쨌든 질문을 받았으니 내가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는 플랜에 대해 쭉 설명했다.
이것도 괜찮았다.
아니, 여기까지 괜찮았다.
나의 긴 대답을 듣고 친척 중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왜 지금 바로 지원 안 하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물과는 완전히 다른 전공인 경영으로 학석사를 졸업했고,
심지어 고등학교도 외고를 졸업했기 때문에 고1 때 공통 과학 과목을 제외하곤 과학 수업이 아예 없다.
때문에 생물, 화학 등과 관련한 제대로 된 지식 습득은 중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다.
게다가 나는 학사를 건너 뛰고 석사를 바로 시작하고자 하기 때문에
학사 레벨에서 쌓을 수 있는 선수 지식은 독학과 온라인 강의 등을 통해 먼저 공부하고, 적어도 지원하고 싶은 랩실 교수님의 논문도 한두 편 읽어보고 지원하는 것이 맞는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현재 나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최선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그 친척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석사는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어도 괜찮으니 일단 먼저 관심 있는 교수님들께 전화로 컨텍을 해서 인맥부터 쌓으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인맥이 중요한 건 나도 알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보다 수시 채용이 더 활발히 이뤄지는 네덜란드에서 인맥의 힘이 얼마나 큰진 나도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인턴 자리와 면접 기회를 나의 인맥을 통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해서 운 좋게 원하는 교수님 랩실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선수 지식이 없으면 공부나 연구 내용을 따라가기가 무지막지하게 어려울 것 같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내가 혼자 집에서 공부하는 있는 것이 아까운 내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닌데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했다.
나도 당연히 안다.
내가 이제 막 대입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도 아니고, 20대 초반도 아니기 때문에 나이도 생각을 안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사실 이미 오래 전에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시간이 절대 낭비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몇 가지 해외 대학의 생물정보학 학사 과정 정보와 석사 과정 입학 요강들을 레퍼런스 삼아 커리큘럼도 직접 짜고,
각 과목을 어떤 방식으로 공부할 것인지도 결정하고,
잠도 줄여가며 열심히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노력은 보지 않고,
그저 '1년 정도는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려고요' 라고 말하는 내 삶의 지극히 단면만 본 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모습에 나는 그날 큰 상처를 받았다.
그 후로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똑같은 내용이 되풀이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는 내내 그의 말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는 지금 공부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야. 그냥 시간 허비하고 있는 거야.'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에 무뎌질 때쯤,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한 인생의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나 삶 전체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상대방을 위한다고 한 말이 어쩌면 그 상대방에겐 큰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대하는 데 있어서 무관심한 관심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들은 그 말은 지금 아주 생생하게 기억 속 영상으로 저장되었고, 나의 가슴 깊이 또렷한 글자로도 새겨졌다.
- 25.668살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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